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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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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drina 2016. 2. 2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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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보다 상위 개념을 전제할 때 서로를 비로소 목적으로, 즉 동등하게 취급한다. 신의 위대성을 잊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왜소함을 잊었다. 서로의 차이를 확대하고 그것에 집착한다.' 


리처드 토니 Richard H. Tawney 

"남들보다 한발 앞서려는" 심리가 주는 "잔인한 쾌락"은 이미 불평등을 전제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를 읽다가 발견한 인용문들이다. 이에 대해 이야기 하기 앞서 다른 책이야기를 우선 해보자 한다. 


<처음만나는 미학>이라는 책으로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1, 2장을 읽었는데 근대 미학의 탄생과 그 이전의 미에 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감성을 일으키는 것을 미(美)라고 한다면 미학은 감성을 다루는 학문일테다. 


근대 이후까지도 감성은 이성의 사유능력에 미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선을 다루는 윤리학과 진리를 다루는 과학의 하위 분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 이성중심의 사고방식이 확립되기 전 진(眞)과 선(善)으로서의 미의 의미는 오히려 색다르게 다가왔다. 독립된 학문으로서 미학이 발달하기 전에, 그리고 근대 이성중심 사유에 대등한 것으로 감성을 올려놓기 전에 감성에 관한 인식은 그 역할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플라톤이 예술가들을 그가 만들 이상국가에서 추방해야 할 존재로 보았고, 예술은 이데아의 모방인 자연을 다시 한번 모방하는 행위에 불과했음에도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자연을 인식하고 신체를 단련해야 했으며 개인과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는 행위를 해야 했다. 궁극의 이데아를 향하기 위해서는 앎과 좋음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과 함께 미의 이데아에도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 행위로서 모방이란 각 사물에 내재한 이데아를 더 부각시키는 활동이다. 따라서 예술은 앎과 좋음으로 이르는 좀 더 직접적인 길이 된다. 종교와 철학(과학), 그리고 예술이 분화되기 전에 이것들은 어떤 위대함을 추구하는 수단이었다. 인간 존재의 하찮음과 자연과 신에 대한 두려움, 혹은 경외의 감정은 예술작품으로 승화되고 신적인 것, 초월적인 것을 닮기 위해 인간은 이성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위대한 행위는 한 사람의 지적 탁월함에 의해서이기도 했지만 다수의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성과 의지를 사용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망은 감성의 영역이다. 


다시 원래의 책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본다. 불평등에 관한 감수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위의 인용은 초월적인 것이 사라진 시대의 감수성은 불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본다. 이를 두고 불평등한 사회가 그런 감수성을 낳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 미학책을 통해 본 것처럼, 오히려 신을 제거하고 난 뒤의 세속적 평등함이 인간 사이의 협력과 연대의 감수성을 앗아가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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