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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것들

흐린기억

by windrina 2013. 3. 1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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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제작이 아닌데, 그런데 시적인 것들>이란 타이틀로 서교동 씨클라우드에서 심보선 시인의 시낭송이 있었다. 


자신이 쓴 시만 아니라 좋아하는 시까지 낭송했는데, 이 행사의 메인은 시인의 친구들과 그 친구의 친구들이 나와서 자신이 생각한 '시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우선 심보선 시인 자신의 표현대로 '오지랖'의 넓이 혹은 깊이를 확인할 수 있었던 '심보선의 친구들'은 근무하는 대학의 교직원, 드럼 가르쳐 주신 선생님(프로 재즈 드러머), 소리연대 활동가(본 직업이 무엇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문화연대에서 활동하는 미술 작가, CBS 라디오 정혜윤 피디,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사회학자 조은 선생님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친구를 자처하며 시적인 순간들, 습작했던 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획은 참신했고/지만 호스트 인맥을 활용해 나온 친구들은 얼떨결에 무슨 행사인지도 모르고 나온 경우가 있어서 집중하기가 수월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 '시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자신이 쑥쓰러워 무슨 행사인지 몰랐다는 너스레를 떠는 것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준비없는 행사에서도 예상치 않은 효과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었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심보선 시인의 동료 시인의 친구의 말이었다. 그녀는 대학 영문과 교수였던 것 같다. 자기가 여기에 참가하게 된 사연은, 무슨행사인지 감을 못잡았다는 말과 함께, 친정이 포항인데 얼마전에 발생한 큰 산불로 집이 전소되었지만 남편과 아이들만 보내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 사연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시는데 정말 '웃픈'상황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나는 시인의 '친구의 친구'라는 자격으로 준비를 해갔는데, 행사 취지를 잘못 이해하고 시를 써 갔다. 하지만 워낙 각 참가자들이 말씀을 잘하고 호응들도 좋아서 다행히 나와 내 친구의 차례는 오지 않았다. 여기에 그 시를 옮겨 놓는다.




장위동 비둘기

그 녀석의 둥지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내부순환로 아래의 
젖은 콘크리트  틈새에서 기어나와
한천로 가로등 위에서 햇볕을 쬐는 거 말고는

뉴타운 바람이 불다 멈춘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고개를 기웃댄다
물망초, 안개꽃, 장군암을 지나 재건축조합사무실 앞에서
진미식당, 한양마트를 지나 성북맨숀 진한연립 놀이터에서
오바사 재단사 시다를 구하던 봉제공장 앞에서 

다른 동네 녀석은 거센 바람 속에서도
둥지를 부수고 한 판 싸움을 벌이러 나간다는데
마을사람들이 무사귀환을 빌며 잔치를 벌인다는데
한 판 싸움은 커녕 부술 둥지도 없는
이 동네 녀석이 자리를 뜨면 
무사히 거기서 빌어먹길 바란다

그 녀석은 알고 있다
룸살롱과 사주카페가 들어서고 대형마트에 푸드코트가 생기는 날
스테이트 캐슬 아파트가 들어서고 미싱소리가 고객님하는 콧소리로 바뀌는 날
망할 줄 모르던 폐업정리 할인점이
정말 사라지는 그날
돌아오지 못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 녀석의 활공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초고속 인터넷 선들이 얽힌 전봇대 아래서 
길냥이들과 잔반통을 헤집다 담벼락 위로 튀어 오르는 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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