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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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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drina 2013. 6. 1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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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동문화예술의전당, http://andongart.go.kr/



동물원에서 코끼리가 탈출했습니다. 하필 이 코끼리가 선거 유세장에 난입을 해서 유력 대선 주자와 시민들을 다치게 만들었어요. 사건 당일 동물원에 일하던 코끼리 조련사를 조사하는 과정이 바로 이 연극의 내용입니다. 


코끼리 조련사를 둘러싼 의사, 형사, 어머니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사건을 재단하고 조련사의 죄를 묻습니다. 조련사는 자기가 풀어준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떠들어 비둘기가 놀라 날아오르고, 이에 거위가 꽥꽥 거리자' 코끼리들이 놀라 우리를 뛰쳐나갔다고 말했지만, 이들은 조련사가 이미 무엇을 했는지 답을 내린 상태입니다. 이제 왜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만 밝혀야하는 상황인 것처럼 보입니다. 


의사는 조련사에게 '코끼리를 사랑하는 지'를 반복적으로 묻고, 이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연결시키면 무죄를 받아 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조련사의 방에서 나온 성인잡지는 온통 코끼리 사진으로 꾸며져 있고, 조련사 자신도 코끼리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시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가 보여주는 증거들은 관객들에게 꽤 설득력이 있지만, 왠지 성도착으로 몰아가는 이 의사가 더 도착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형사는 이 사건이 정치적 음모에 있다고 봅니다. 동물원의 간부가 피해 정치인의 상대 후보와 친분이 있다는 단서를 잡고 늘어집니다. 기소에 유리한 진술을 얻어내려는 형사의 능글맞은 유도심문은 관객을 즐겁게 합니다. 


조련사의 엄마는 그가 '어린 시절 부터 갇힌 동물들을 풀어주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조련사는 코끼리 탈출 사건을 통해 감옥으로 들어가 그곳의 수감자들을 풀어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조련사는 계속 '그게 아닌데'라고 말해보지만, 사람들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미 결론이 준비되어 있고 그것은 조금씩 드러나는 조련사의 진술과 보충되는 정황과 증거들을 통해 그럴듯하게 완성이 됩니다. 의사와 형사, 그리고 엄마의 전형적인 태도는 우스꽝스럽지만 사건을 재구성하는 그들의 서사는 설득력을 가집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의 추론 방식이 아니라면 이 사건들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요? 그저 코끼리가 우리를 벗어나는 시점에 아이가 떠들고, 비둘기가 날아오르고, 거위가 소리를 질렀을 뿐인, 단순 사실들의 나열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습니다. 각각은 말이되는 설명을 완성하는데 결국 각각의 설명은 완전히 다른 가정과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에게 이 사건은 조련사의 성도착이 문제고, 형사에겐 반대파 정치인을 제거하기 위한 사주에 의한 것이었으며, 어머니에겐 아들의 자비심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설명(심리, 정치, 윤리에 상응하는)은 주인공의 거부에도 나름의 설득력을 가집니다. 하지만 이 설명들은 서로 화해할 수 없죠. 


급기야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주인공은 코끼리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저는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조련사의 소통방식은 이미 코끼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게 아닌데'만을 반복할 뿐, 각각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소명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우발적인 행동들의 연쇄였다고, 의도되지 않고, 계획되지 않은 사건들의 연쇄가 코끼리의 탈출과 정치인의 부상을 낳았을 뿐이라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조련사는 소통 불가능에 지쳐 코끼리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소통 불가능의 조건 속에서, 제시되는 부분적인 사실들만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능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조련사는 어떤 서사의 지도를 따라 미로를 헤쳐나가는 능력을 상실한(혹은 거부한) 사람 같습니다. 


많은 포스트모던사상가들이 거대 서사의 종말을 말합니다. (연극을 보신 분들은 이해하실 드립. "포스트모던이 무슨 말인지 아시죠?") 기댈만한 서사의 구조가 사라진 곳에서 인간은 동물화한다는 주장이 떠오르는 연극이었습니다. 







배역 및 출연진


■ 작가 

이 미 경

■ 연출 

김 광 보 (극단 청우 대표)

 

■ 출연진

 

윤상화 /조련사 

문경희 / 어머니 

강승민 / 동료&코끼리 

유성주 / 의사

유재명 /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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