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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남쪽으로 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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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drina 2013. 3. 9.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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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영화다. 한때 혁명을 꿈꾸었던 청년이었고, 그 열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사는 사내 최해갑(김윤석)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코미디 영화를 보고나서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는데 바로 후반부 남해의 작은 섬으로 이사를 가면서부터 그게 좀 확실해졌다. 


감상평을 짧게 쓰라면 '김윤석이 망쳐버린 영화'랄까.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들려왔던 제작과정의 난항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부분은 오히려 김윤석이 억울한 부분이 많을 듯 싶다.   


영화의 전반부는 내가 그동안 배우 김윤석에게 보았던 아버지(혹은 유사 가족에서의 보호자)역할이 너무 훌륭해서 -추격자의 포주, 천하장사 마돈나의 아버지, 완득이의 선생님- 이제 그런 역할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 줄만 알았다. 까칠하고 묵뚝뚝하거나 매우 나쁜 놈이었지만 '내 자식에게만은 따뜻하겠지'를 발견하게 되는 그런 아버지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천하장사 마돈나>에서의 대사 "가드 올리고, 상대방 주시하고…"가 너무 서늘했기 때문에 이후의 캐릭터들과 분리해서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도 사실 <남쪽으로 튀어>를 폄훼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는 되지 않았다. 그는 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으며 (아이들이 보기에) 철없고 찌질한 아버지 역할은 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힘이다. 여기서 이 영화가 망하는 테크를 탄 셈이다. 문제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세대론의 함정에 빠져버렸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 세대론 마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찌질한 아버지가 알고보니 대단한 혁명 투사였다는 설정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최해갑은 지문날인 반대를 외치는 다큐를 상영하고, 세금도 내지 않고, 고향에서 재개발 반대 운동을 하러 상경한 후배를 감싸다 쫓겨나듯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의 자식들은 이런 별난 아버지가 이해 불가다. 학교는 안다니는 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실제로 첫째는 중퇴하고 의상 디자인 학원을 다니며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 여기는 분명 세대 갈등의 요소가 등장하기 마련인데도 세 자녀와 아버지의 갈등은 전면화되지 않는다. 게다가 같은 운동권이었던 아내 안봉희(오연수)는 아무런 불만도 없이 이 철부지 남편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 영화 전반부는 그저 최해갑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온 가족이 동원되는 셈이다. 세대 갈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삿짐과 함께 보따리에 싸여 고향으로 내려간다. 


두번째 문제는 이 세대론을 어떻게 풀어가는 가다. 최해갑은 아나키스트로 나오지만 이는 혁명을 팔아 먹은 옛동료들과 변별하기 위한 설정처럼 보인다. 그의 옛 동료들은 자신의 고향 후배를 꼬드겨 그 지역 출신 국회의원을 엿먹이려다 미수에 그치고, 그 자신이 속했던 386세대에 환멸을 느낀 주인공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향으로 내려간다. 고향에서 최해갑의 할아버지는 신화적 존재다. 최해갑의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자신이 물려받은 섬의 모든 땅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일본놈들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옥살이를 하고 상상의 섬으로 떠난 것으로 나온다. 이 설정은 원작인 소설에선 어떻게 그려졌는 지 모르겠다. 영화에서는 여전히 해방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 386에게 좌익 운동의 원형질을 간직한 남도와 대면하게 하는 효과를 일으키려는 것으로 보였다. 섬을 재개발하려는 지역 유지와 국회의원들에 맞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고, 국회의원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이는 좌충우돌 에피소드 끝에 일단 철거는 막아낸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다시보게 되면서, 최해갑은 공중파 예능스러운 명언을 남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결국 유쾌하긴 한데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 사회에 좌익은 뿌리가 뽑혔다.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정부 차원의 활동에도, 기층 마을 단위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위령비하나 못세우는 실정이다. 대개가 빨갱이로 몰려 죽었거나, 빨갱이라서 죽었거나, 월북해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만이 아니라 이웃, 종친에 대한 불신이다. 살아 남은 자들은 과거 동네에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쉬쉬하고, 반대로 전후 면장이나 한자리 해먹을 처치에 있는 자들은 남한사회가 우경화되는 데 적극 협력하게 되는 것이고. 산업화와 더불어 잘난 놈은 서울로 보내 중앙 정부나 대기업에 일을 시키는 게 잔혹한 역사를 잊는 방편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드는 것이다. 물론 쎄빠지게 돈벌어서 유학보냈더니 가서 데모나 하는 최해구와 같은 인물도 있고, 그 덕분에 한 세대 건너 민주화도 이루게 된 것이지만… 


영화에서 낭만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배타고 상상의 섬으로 떠났다는 최해구네 할아버지 이야기를 현실의 우리 역사에 대입해보면, 계몽된 지식인이었던 지주의 아들이 가진 땅을 다 나눠주고 해방이 되자 미군정과 우익 단체에 표적이 되기 전 월북했다는 은유가 된다. 그리고 남겨진 이웃과 친지들은…. 영화에서처럼 재개발에 눈먼 외지인과 순진한 동네 늙은이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최해구가 대면해야 했던 해방공간은 (이권에 결탁한)국가와의 싸움이 아니라 인민들 간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민 간의 적대는 (반국가주의적인 최해구와는 달리) 국가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한편으로 약한 국가(혹은 정치)가 어떻게 인민간의 적대를 증폭시켰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도는 좋았다. 386세대가 88만원 세대와 대면하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너희들 아버지, 할아버지와 만나보라. 그런데 이렇게 낭만화해선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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