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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싸움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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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drina 2013. 2. 18.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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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産 


#0

주인공인 청년 '퀵 27호'는 살기 위해 퀵 서비스를 한다. 먹고 살 돈을 벌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이 위험한 스피드 자체에 집착하고 있다. 무엇을 쫓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에 쫓기는 것인지 우리가 궁금해 할 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무전이 안내하는 목적지로 달리고, 욕을 하고, 꿈을 꾼다.

사진 출처: http://www.newstage.co.kr


무대 가운데에는 사각의 단상이 있다. 이 단상 위에는 '퀵 27호'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이 교차로 투입된다. 하지만 사각의 단상 위에서 역할이 끝난 배우들은 무대 밖으로 퇴장하지 않고 단상 밖으로 비껴나 있다. 마치 억압된 기억이 하나의 유령이 되어 주변을 배회하다 출몰하듯이. 이 단상은 격투 경기가 벌어지는 링이자, 어머니가 등장하는 주인공의 꿈 속, 그가 현실에서 지내는 단칸방, 살기위해 끊임없이 달려야만 하는 도로 위다. 



#1
최교수는 저명한 심리학자다. 그는 관객을 향해 주인공의 억압된 기억(폭력적 아버지와 그를 살해했던 기억)을 끄집어 내겠다고 호언한다. 그는 청년에게 '퀵 27호'라는 이종격투기 선수의 이름을 지어 준다. 그리고 사각의 링위에서 '마스크맨'을 상대할 것을, 하지만 당분간은 처절하게 패배해야 함을 강조했다. 너의 성공은 바로 이 링 안에서 실패의 이야기를 축적해 나가는 것에 있다면서. 

 최교수는 자신만만하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이 장치(단상) 안에서 청년이 통제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를 집어 넣어 보았지요." 그는 현실에는 없는 주인공 어머니를 대신 할 옆방 여자와 자신의 딸을 투입시켰다. 이 옆방 여자는 유일하게 주인공을 성가시게 하며 잠을 깨우는 존재다. 아마도 이 여성들은 영화 <인셉션>의,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도록 하는 '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어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무대 위 단상은 이제 어머니의 자궁이자, 옆방 여자의 표현처럼 숨 쉬는 게 가능한 어항이 되었다. 그녀는 자기 배 속의 아이의 소리를 주인공에게 들려주었고, 이 행위는 언젠가는 이 단상(자궁, 어항, 사각의 링, 퀵 오토바이가 다니는 도로, 혹은 억압된 기억) 밖을 나가게 될 것임을, 혹은 나갈 수 있을 것을 암시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최교수에겐 의도하지 않은 변수였다. 최교수는 자신의 아내에게는 '분홍색 알약'을 먹이며 계속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같은 최교수의 전횡을 막을 사람은 주변엔 없다. 최교수는 자궁을 가진 '그녀들'이 '잠을 깨우는' 존재임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장치 속에서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고, 그녀들 역시 언제든지 분홍 알약을 먹이듯 장치에서 철수시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주인공은 자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그는 더이상 어둠 속에서 죽은 아버지의 잔영같은 유령들을 향해 헛발질을 하지 않는다. 그는 '마스크 맨'을 이기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서부터 청년은 절규한다. 항상 목적지에 닿는 것이 불가능한 청년의 현실(언제나 퀵 서비스의 목적지는 무전기에서 잘못 안내된다)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기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마스크 맨'(최교수는 바로 그 무전기를 통해 링 위의 주인공에게 이기지 말 것을 종용한다)이 포개지면서 주인공은 드디어 '아버지 살해'장면과 맞닥뜨린다. 

#3
주인공은 아버지를 죽였고, 마스크 맨을 처참하게 때려 눕혔다. 그리고 최교수에게도 덤볐고, 옆방 여자의 목을 졸랐다. 처음에 호언한대로 '퀵 27호'는 억압된 기억을 대면했다. 그리고 최교수는 관념의 자궁을 만들고 그를 새로 태어 나게 만드려 했지만, 그는 폭주하는 괴물이 되었다. 나는 최교수가 괴물을 잉태하는 장치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의 아내에게 분홍 알약을 먹이는 것처럼, 청년의 아픔을 조작가능한 것, 청년을 격리시켜 실험하며 자신은 그 아픔에 '전이'받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노동자계급을 '대변한다'는 <자본>의 서술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난해함이 인텐리의 작업에 의해 더욱 심화될 수도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곤란도 마르크스주의에게 고유한 것이 아님은 예술의 예에서 익히 보는 대로다. 인텔리의 '선의'에도 불구한 이 역설은 대중과 '교통하고' 대중에게 '교육받음'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정신분석가와 달리 '역전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다. "
-윤소영, '피디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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