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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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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drina 2014. 9. 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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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토론문


1. ’마을 만들기'라는 사업을 한정해서 보자.  행정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집행하는 주민과 활동가들을 보면서 체계의 언어에 오염이 되었다고 한다. 분명 주민이 어려운 행정용어까지 익혀가며 그들이 쳐놓은 실국의 테두리, 통치 구획 안에서 마을을 만드는 것은 부정적인 측면이 크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를 하면 안될 것이 적어도 서울시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이 '주민'의 형성과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주민인가라는 물음(모든 주민을 포괄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의 질문)은 건전하지만 별 소용없는 질문인 것 같다. 행정이 풀어가는 일의 방식과 정치가 풀어가는 일의 방식이 있다고 본다. 만일 행정 주도의 마을 만들기 사업이  지역의 자율적 시민사회운동을 해체하고 건전한 마을 주체의 형성을 방해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건 이미 망가져 있다. 


단순히 마을 만들기 사업에서 행정용어가 보편화되고 사회적 경제 생태계 조성 사업에서 경영과 회계 용어를 남발하는 것을 두고 자본과 행정에 포섭되는 것이라는 판단은 성급하다. 단순히 주민주도의 정치와 경제활동의 용어가 체계의 언어라고 해서 운동의 지향이 변했다고 할 수 있을까. 주민의 욕구와 필요는 늘 거기 있다. 변한 건 활동가다. 


분명 운동과 생활세계는 자신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 거꾸로 서울에서 시행하는 마을 공동체 사업은 과도한 주민 주도성을 요구해서 주민들이 행정 용어와 관이 설정한 보조금 사용 기준을 학습할 정도다. 이건 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을 수탁하는 단체가 사업 운영 형태만 설계하고 실제 협약은 행정과 주민이 직접하기 때문이다. 여긴 오히려 활동가의 개입 가능성이 적어서 문제다. 주민이 의견을 내고, 주민이 쌈짓돈을 꺼내도록 유도하는 것은 결국 행정이든, 주민조직가든 마찬가지의 과정을 밟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 속의 취약 계층에겐 활동가를 비롯한 지역의 시민사회 활동가가 도움을 주고 주체로 설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행정의 마을만들기 사업은 활동가가 포함되는 사업 제안에 패널티를 주거나 자부담 요건을 포함하면서 취약계층이 자립하고 관계망을 형성하는데 별 소용이 없을 때도 있다.



2. 한편 행정은 스스로 마을 만들기 사업에 전적으로 손을 뗄 수는 없다. 사회필수 서비스의 공급을 외주화하는 맥락에서 주민의 등장은 손쉬운 정책 목표 달성 방법이기 때문이다. 행정 주도의 마을만들기 사업이 정치의 공간을 줄여버리고 있다고 하는데 정치의 공간 자체가 지역의 다양한 결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본에 의해 파괴되는 지역 공동체의 공간들(결사체들)은 정치를 통해 수호/재구성되고자 한다. 결국 그것의 법률적 제도적 표현이 행정이다. 삶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표면화하고 의제화하는 것이 정치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역 결사체들에 개입해야 하지 않을까. 마을 만들기 사업은 그 수단들 중 하나이자, 대항해야할 목표이기도 하다. 어떤 결사체는 우리의 정치의 출발이지만 어떤 결사체는 우리의 정치가 대결해야할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을만들기 사업이 사회운동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 진실인가? 사회적 경제가 신자유주의의 보충물이고, 마을만들기가 공적서비스의 민영화 과정의 일부라고 하는데, 오히려 사회운동/정치운동의 전반의 침체가 활동가들을 사회적 경제와 마을 공동체 사업으로 선회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활동가들이 정치를 우회하는 수단으로써 민관거버넌스를 들고 나온 것은 아닌가.


3.사회적경제 분야가 사영화의 단계라고 하는 논리는 이미 늦은 문제제기다. 이미 공공서비스 시장은 상당히 시장화되어 민간 위탁이 많이 이루어졌다. 그것을 다시 어떻게 사회적 소유나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 것인가가 관건이라 본다. 정치를 통해 통제되는 행정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민간 사이의 협력, 민간과 행정의 협력이라는 다른 경로를 통한 사회적 통제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과거 주민조직화 과정을 통한 빈민운동이 제도화되었고 결국 행정의 복지전달체계에 편입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의미없는 것이 아니듯 생활세계를 조직하는 것 자체를 체계 편입시도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 


생활세계의 필요가 이념과 가치 중심의 운동보다 중요하다는 권단(대담자)씨 지적은 동의. 하지만 생활세계의 서로 다른 필요들을 조직하고 그것들 간의 갈등을 다루는 것(갈등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정치다. 정치는 이념을 다루지 않을 수 없는 문제. 정치를 외면하고 생활세계가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체계와 자본에 대항한 자치와 자립의 대안적 삶의 양식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결사체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수평적 수직적으로 연결하는 경험들이 필요하다. 일부 저자가 표현하듯 이미 체계와 자본이 빈틈없이 생활세계의 공간을 없애버리고 있다면 문제를 푸는 방법이나 기반도 이미 파괴되어 버리고 없는 것이 된다. 우리가 정치의 가능성을 보는 것은 끊임없이 체계에 포섭되지 않은 생활세계를 지켜내는 것에만 있지 않다. 정치는 때론 체계를 이용해 생활세계를 재조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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