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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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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drina 2014. 12. 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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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연극을 본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정리가 되었는데 <중독>은 처음에 소통의 불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들인 것 같았다. 그 친구는 연극을 본 후 주변과 소통의 의지가 부족했음을 고백하며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불만들이 쌓이다가 끝내 울분이 폭발하거나 관계를 끊어야만 할 때 그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 친구와의 평소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들은 늘 나오는 것이었고, 이 연극을 보지 않았더라도 반복됐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연극을 친구의 말처럼 소통의 의지가 부족한 게 문제라는 식으로 읽지 않았다. 오히려 중년 남성들의 강한 소통 의지가 젊은 남성에게 '악'을 대물림하고 있다고 보았다. 젊은 남성은 소통을 회피할 방법도 거부할 능력도 가지지 못한게 이 극의 설정인 것이다.


이 연극은 5개의 에피소드를 가진 2인극이다. 각 막을 이루는 에피소드에는 언제나 중년남성과 젊은 남성이 나오는데 각 에피소드는 무대 장치(위태롭게 쌓아 올린 서랍과 책걸상)를 통해 살인, 구입, 사랑, 고독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5번째 에피소드 '마지막'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에 대한 나름의 답변이자 중년 남성과 젊은 남성 사이의 대물림이 완료되었음(중년남성이 죽으면서)을 보여준다.  


각 에피소드에서 각각의 중년 남성은 소통에의 의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피력한다. 이렇게 보면 살인, 구입, 사랑, 고독은 두 남자가 관계맺게 되는 어떤 상황이나 조건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 조건은 그자체로 두 사람 관계에서 중년남성의 우위를 가능케 한다. 그 소통의 의지는 성공하거나 실패하면서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악의 대물림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1]젊은 남성이 자신의 아들을 '살인'하면서 시작된 중년 남성의 복수는 그를 끝장내는데 있지 않고 수치심과 두려움을 알게 하는데 있었다.  


[2]회사의 지부장과 사원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소비자 대중에 대한 욕망의 조작 가능성(망각과 욕심을 반복적으로 자극하며 끊임없이 소비하게 만드는 것)에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면서도, 지부장은 사원의 유일한 생의 의지가 담긴 문신들을 지우려고 한다. 지부장 자리를 걸고 문신을 지우기를 요구하는 중년 남성은 회사가 소비자 대중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젊은 남성의 생의 의지를 박탈하고 조작 가능한 자의식만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3]어린시절 가족을 버렸다가 뒤늦게 아들을 찾아온 아버지는 자신의 고백이 담긴 테이프를 건넨다. 이미 삶은 망가져 마약 등을 밀매하는 아들은 이런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다.[각주:1]


[4]네번째 에피소드는 고아원 출신의 두 남성이 원장의 장례식을 계기로 만나는 이야기다. 여기서는 고아원을 벗어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년 남성이 고아원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늘어 놓으며 원장을 닮으려는 젊은 남성에게 주의를 주지만 젊은 남성은 원장이 되살아난 듯 그를 자극하고 흥분시킨다.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흥분하는 중년 남성은 원장의 욕을 하고, 이를 본 젊은 남성은 원장이 당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데 그럴 수 있냐며 신뢰하지 않는다. 이렇게 젊은 남성은 원장을 닮아 갈 것이다.[각주:2]


[5]'마지막' 에피소드는 결론적으로 젊은 남성이 아버지인 중년 남성을 죽이는 장면이다. 그것은 일견 소통의 의지가 없는(알콜 중독에 담배만 달라고 중얼거리는)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을 통해 적극적인 소통을 원하는 젊은 남성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앞선 에피소드들의 강한 소통 의지를 가진 중년 남성을 거부하는 장면으로도 읽힌다. 그렇다면 부친을 살해한 뒤 아들의 즉각적인(그리고 인간적인) 후회와 슬픔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의지가 강하거나 약하거나 이 젊은 남성은 중년 남성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중년 남성의 강한 소통 의지에 굴복했던 자신을 원망하는 모습일까. 


1막에서 4막에 이르기까지 중년 남성은 젊은 남성에게 다가감으로써 어떤 악을 대물림하는데 늘 소통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통에 실패하면서 어떤 악이 되물림되기도 하고(고아원 원장의 잔인함) 소통에 성공하면서 자신의 가치와 의지(두려움과 수치심, 생에 의지 제거)가 관철되기도 한다. 이 극은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소통 자체가 '독'이 되는 관계가 왜 계속 반복(중독)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1. 아버지의 고백을 듣는들 자신의 시궁창에 빠진 삶이 구원될까. 여기서 관객들이 잘 공감이 안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관습화된 서사는 아버지의 고백을 통해 어떤 구원이나 파국이 이어질거라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막이 그런 파국을 암시하지만 관객들은 이 순간만큼은 아들이 끝내 아버지의 고백이 담긴 테이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이 아들에게 어떤 구원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소통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 그렇게 보면 여기서는 중년 남성의 젊은 남성에 대한 일방향의 관계의 강요가 아니라 원장의 이름으로 어떤 소통의 강요가 작동하는 것 같다. 원장은 죽기 전 젊은 남성에게 중년 남성에 대한 걱정과 연민을 드러냈었고 그것이 젊은 남성으로 하여금 중년 남성을 찾게 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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