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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전라디언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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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drina 2022. 5. 2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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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디언'이라는 말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호남인을 비하하는 의도로 사용하는 용어다. 이 단어가 극우 커뮤니티에서 사용될 때는 차별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 공격적 언어이자,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극단적 정치문화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그런 차별의 대상이 그 단어를 사용한다면 어떨까?
저자는 '전라디언'이라는 말이 미국의 인종차별적 언어 'nigger(깜둥이)'와 비슷한 효과를 가진다면서 호남 차별의 기원이 해방후 한국사회의 발전과정을 되짚어보고 있다. 호남 출신인 저자 자신이 호남 차별의 기원을 흥미롭게 추적하면서, 단순히 호남 바깥의 한국인들에게 '호남 차별을 멈추라'고 도덕적으로 설교하거나 '호남 발전을 위한 예산이 필요하다'고 보상의 필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양극화로 인해 지역차별이 장기화되고, 이로 인해 호남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의 내재적 발전역량이 침식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책은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지역균형발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읽어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호남 지역의 저발전을 지역주의라는 이름의 정치・사회적 차별 탓으로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지역 내부의 혁신 역량의 미비를 따져 묻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지방분권이 지방을 망친다'는 마강래 교수의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강래 교수는 분권이 바로 지방의 자립과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지자체 간의 협력과 특화 집중의 발전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책도 수도권 집중도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역의 내재적 발전역량의 축적을 위한 정치・경제적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학을 전공한 터라 지역주의 투표성향에 대한 논의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군사독재 시기 부산・경남 지역과 호남지역은 야도野都 라고 불려왔지만, 민주화 이후 재야세력의 이합집산으로 지금의 지역정당체제가 굳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지역을 기반으로 한 두 정당은 각각 영남과 호남을 자신의 표밭으로 삼고 수도권 및 그 외의 지역에서 대결하면서 집권과 실권을 반복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호남 역시도 지역주의의 희생자이면서 어느 순간에는 거기에 순응해 반사이익을 얻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정치적 지역주의(라고 쓰고 호남차별로 읽는) 이전에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경로에서 호남이 배제되는 과정부터 짚고 있다. 즉 경제적 저발전의 기저에는 해방 직후 원조경제를 탈피해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호남 엘리트에 대한 견제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50년대에는 북에서 탄압을 피해 내려온 기업인들이 활약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의 야당 견제(공교롭게도 호남 지주계급으로 이루어진 한민당) 맥락의 원조경제에서의 배제,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 경북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섬유기업들에게 수출산업화의 길을 터준 경우, 경남 해안지역의 도시들에 중화학 공업화가 진행되었던 것. 이들 모두 출향 엘리트 간의 정경유착의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영호남의 초기 경제적 발전경로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중앙과 지방의 양극화다. 이제 경남에 있는 대기업의 본사도 서울에 모여 있고, 과거 영남지역의 발전을 견인했던 출향 엘리트들도 세대를 거치면서 지역과의 연결이 약해졌다. 이제는 그들의 이해관계가 지역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과 수도권에 있는 자산과 학벌 유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호남을 각각의 출세의 기반으로 가졌던 엘리트와 정당들은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저발전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호남지역의 엘리트들은 이렇다 할 경제적 발전 전략 없이 정부예산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가 고착화되었고, 이런 구조 하에서는 정치적 대안도 나타날 수 없게 된다. 광주 학동 참사와 복합쇼핑몰 유치 운동 등 지역민심은 끓고 있지만 민주당 외에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말하고 싶은 건 호남 차별은 그 시작이 어떠하건 현재에 이르러서는 한국 사회의 지방소멸의 일반적 경향의 한 가지 사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진단하는 지역의 저발전과 허구적인 정치 경쟁은 모두가 참고할만 하다. 더 이상 중앙을 향한 예산 따오기 경쟁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울 뿐더러 그 예산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역 토호들의 유착만 강화시킬 뿐이다.
지역에서 대안적 발전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역량 강화가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수정당의 지역 정치 진출이 가능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선거구 조정, 비례대표 확대, 지역정당 설립 허용)이 필요하고, 지역개발계획 수립과정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지방정부가 필요하다. 또한 지역 발전을 견인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금융 조달을 맡을 (지역 토호와 정치권에서 독립적인)전문성 있는 투자기관 설립과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을 담당할 인력양성을 위한 대학이 필요하다.
더 이상 중앙정치에서 권력을 잡길 기다리면서 낙수효과만 바라는 것으론 지역을 살릴 수 없다는 게 저자의 핵심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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